과거 공자와 순자가 사람들을보며

그 천성이 악한지 선한지를 논했다.

어쩌면 당시엔 선과 악 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작금의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 한가지 더하고 싶은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우설(性愚說)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리석다는 뜻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인간답게, 제 값어치를 할때까지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이처럼 오랜기간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

동물들과 달리 글도 배워야하고 의사소통을 위한 말도 배워야해서 그럴까?

학교를 다녀야해서??

동물들중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는 종류가 있다.

태어나기전 어미가 죽거나, 어미의 시체를 양분으로해서 생명이 시작되는 동물도 있다.

그들에겐 단 한마디의 가르침도 없지만

평생 자연의 한부분을 담당하며 살아간다.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걷는 동물도 있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알에서 깬 곳을 찾아오는 동물도 있다.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다 아니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왜 그리 오랜 교육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역으로 인간은 그만큼 무지하고 무식하고 어리석음이 아닐까?

우습지만 수십년을 보내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도 많다.

조사해본적은 없지만 성체가 된 동물들이 제대로 살아가는 수 보다

인간이 성인이되고 제대로 살아가는 수가 상대적으로 더 적지 않을까 싶다.

인간을 폄하하기 보다는

만물의 영장이고 그 어떤 동물들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그 사실만으로 자위하는 모지리들에게 일침을 날리기 위함이다.

손자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동물들보다는 뛰어나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이고

자신을 돌아보면 참 어리석은 존재임을

하찮은 존재임을 깨달아야함에도

그런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전에도 없던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

스스로의 무지와 무식, 어리석음을 감추려고만 할 뿐이란 얘기다.

자신을 냉정히 볼 수 있어야 타인도 냉정히 볼 수 있고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그 어리석음에서 깨쳐나올수 있음에도

그저 어리석다는 말에 화를 내고 기분 상해한다.

정말 재미난 것은

바보에게 바보라고하면 화를 낸다.

어리석은 이에게 어리석다하면 화를 내고

무식한 놈에게 무식하다하면 성을 내고

무지한 이에게 공부좀 하라고하면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 한다.

내로남불, 핑계, 변명 등

객관성과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는 현대인들을 보고 있자면

이것들이 사람인가 싶다.

정말 개 돼지며,

아니 짐승보다 못한 존재들이 스스로 자신을 과시하는

볼상사나운 벌레를 보고있는 느낌이 든다.

필자 또한 어리석은 존재다.

성우설(性愚說)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다만 어리석음을 알기에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일뿐이다.

뛰어난 사람, 천재들은 본인이 아닌 타인들이 먼저 알아보고 인정해준다.

평범하지도 못하고 어리석음의 끝판왕을 달리는 자들이

자신이 똑똑하다 생각하고, 자신은 평균은 된다 말한다.

냉정히 생각해보자.

난 내가 어리석어 성우설을 생각해 냈다.

그럼 이런것을 상상조차 못한 당신은 뭘까??

수저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때

흡사 시대를 풍미했던 광고들의 카피를 보는 기분이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얘긴지 모르겠지만 광고의 카피처럼 사람들에게 짧은 임펙트를 주기엔 충분했을터...

식상하고 재미없고 공감하지 못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금수저니 흙수저니 단어만 나열하고 그칠것이 아니라 이것에 대한 더 깊은, 객관적인 비판의 시각을 가져보는 것이 옳은일이
아닐까??

수저론이 한시대를 풍자하는 아니, 론 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저'라는 단어를 갖다대었을뿐 부, 신분의 차이, 그 한계는 과거에 더 심했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한 이 부분은 지칭하는 단어가 바뀔순 있어도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필자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소위 말하는 수저론을 들고 나온것일까?

개인적으로 노블레주오블리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런거 필요없다.

다만 그들이 해야할 일은 다른곳에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영화 '아이언맨'을 보면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수저 수준이다.

그래서(?) 하고싶은것을 한다.

돈 신경 안쓰고 시간 맘껏 투자한다.

아무데나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다.

"하고싶은일을 해라. 좋아하는 일을 해라. "

라는 등의 썩어빠진 거짓말을 떠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좋아하는일, 하고싶은일을 하라는 얘기는 '노오오오오력'을 강조하는 헛소리랑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찾기도 힘들지만 그 능력을 돈버는데 소진하고만다.

영화 얘길했지만 박사는 첨단기술이 집약된 연구소에서 몇십년을 보냈지만

토니 스타크가 동굴에서 만들어낸 소형 아크원자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는 평범한, 굳에 수저로 표현하자면 동수저나 은수저쯤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럼 영화말고 현실세계를 한번 둘러보자.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

모르는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뉴튼에게 열명이 넘는 가정교사가 있었다고한다.

남들은 사과가 떨어지면 줏어먹기 바빴고

한가롭게 앉아서 사과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지도 못했다.

그의 발견엔 배경이 큰 몫을 담당했다.

쇼펜하우어 또한 부유한 환경에서 살았다.

먹고자고 놀면서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고한다.

시쳇말로 '한량', 소위 말하는 백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현대철학에 큰 획을 긋게된다.

필자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은...

인류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을 위해선 기본적으로 막고사는데 얽메이는 환경을 없애야한다는 것이다.

더 나은 미래와 삶을 꿈꾼다면 누구나 앉아서 사과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한다는 얘기다.

다 본다고 모두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내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또 다른 것을 알아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북유럽 선진국들이 자국민들이 적어도 굶어 죽게 만들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100명중에 단 한명도 만류인력을 찾아내지 못할지라도, 천명중에 아니, 만명, 백만명 중에 한 사람만 그것을 발견해내면된다.

나머지 99만 9999명은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그 한명을 얻게위한 재료(?)의 개념인것이다.

무상복지가 사람은 해태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사람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것은 먹고살만해서가 아니라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국민수준이 열악한 이 나라에서 무상복지를 한다면 온 국민이 일은 안하고 놀기만 하겠지만...

어쨌든 항간에 유행인 수저론은 새로운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들이 사고를 게을리하니 마치 새로운 것인양 유행아닌 유행을 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할 필요도, 이런 글을 왜 쓰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는 이 사회가, 이 나라의 국민들이 한심스럽고 안타까울뿐이다.

이런거 몰라도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오히려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실상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고, 그저 남들에게 이용만 당하며 사는 사람일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국민의 대다수임이 안타까울뿐이지만 말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선 숙연해지고 진지해진다.

이것이 세뇌건 교육이건 강요건간에

세계 어느나라 어느 구석을가도

어느 종교나 철학을 봐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쉽게 다루지 못한다.

결국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민해야할 단어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닐까싶다.

대다수는 돈을 꼽고, 돈에 얽메여 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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