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다는 기준이 뭘까요?

공부를 잘하면 똑똑한 걸까요?

무엇이든 한 분야에 경쟁력이 있으면 똑똑하다고 해야하는걸까요?

IQ 검사를 받으면 알까요??

공부를 기준삼기 전에 공부에 대한 정의가 정확히 자리잡고 있어야겠죠.

어떤분야에서 어떤 경재력이 있는지 고민해봐야겠죠.

단순히 신체구조로 잘 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IQ검사가 정확히 어떤 검사인지를 아는것이 먼저겠고요.

스스로를 혹은 타인에 대해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똑똑함과 멍청함을 구분짓는 기준...

수많은 기준이 있지만

감히 저는 한 문장으로 정리해 봅니다.

"당신은 똑똑하다고 생각합니까? 멍청하다고 생각합니까?"

이 문장에 이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대답이 나오겠지만

일단 '난 똑똑해요' 라는 대답은 멍청한겁니다.

두가지중에 하나를 물었으니 하나로 답을 하는게 맞다고요? 멍청하다고 할순 없으니 똑똑하다고 말한다고요?

스스로 멍청하다고 얘기하면 자존감이 낮고 자기애가 없고 소극적이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그게 왜 멍청하냐고요??

네 일단 그런 단답형 교육에 젖어 있고, 질문자의 의도나 왜 저런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남들이 이런질문렌 이렇게 답하는거다 라는 이상하고 멍청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죠.

멍청하게 가르쳤는데 똑똑한 제자가 나올 순 없습니다.



'좀 멍청한 구석도 있지만, 그렇다고 멍청한건 아닌것 같고 아주 똑똑하진 않지만 그래도 평균은 하는것 같아요.'

그럼 이런 답변은 어떨까요??

나름 단답형보다 낫지만... 똑똑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넌 뭐가 그리 대단하고 똑똑해서 이런 이야길 하냐고 하시는분도 계실껍니다.

사실 저는 굉장히 멍청한 사람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사실이죠.

저는 멍청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찾고 더 많은시간 찾아보고 읽어보고 생각합니다.

그렇게해서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멍청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이 반복되면 똑똑해지는것 아닐까요??

사람은 누구나 멍청합니다.

성악설 성선설에 빗대어보자면

저는 성똑설보단 성멍설을 주장할겁니다.

똑똑하다면 더이상의 교육도, 사고도, 정보고 의미가 없겠죠.

멍청하니깐, 잘 모르니깐 장시간 교육을 받고,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이는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멍청하다.'는 진리를 깨우쳐야 똑똑함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이죠.

똑똑해서 뭐하느냐고요??

그럼 똑똑이라는 글자를 성공이라고 바꿔봅시다.

똑똑해지고 싶으세요?

성공하고 싶으세요??

그럼 자신의 멍청함을 깨달아야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합니다.

폄하가 아닌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에서, 그 암울하고 참담하고 빛이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작점입니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내 출발점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아야하지 않을까요??

100미터 앞에 결승점이 있는데 내가 13초에 뛸수 있을지 15초에 뛸 수 있을지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대충은 알아야죠.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서 내 출발위치가 0미터 지점인지 10미터 지점인지 -100미터 지점인지 알아야하겠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똑똑해질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허나 똑똑한 사람들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엔 차이가 있을수밖에 없어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곳이 선진국이고 선진문명이 되며, 그렇지 못한 나라가 후진국이 되며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는 나라가 됩니다.

그런의미에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죠.

폄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현실을 이야기했는데 폄하라고 이야기하면 그 현실이 바뀌나요??

그럼 미래는 바뀌나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출발점을 정확하게 아는것 부터가 시작이니까요.

내 자신을 냉정히 바라볼 수 있어야, 타인과 사회도 냉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노력과 경험으로 타인과 사회를 알 수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자아비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누구나 다 아는 문구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이 사회가, 사람들이 무식하고 멍청하다는 반증이 되겠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멍청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최소한 나보다는 나은 사람이고,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난 멍청하다.'라고 이야기해봅시다.

멍청해야 더 찾아보고 공부하고 연구하게 됩니다.

멍청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해야 발전이 있습니다.

다시한번 여쭤봅니다.

"당신은 똑똑한가요 멍청한가요??"

수저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때

흡사 시대를 풍미했던 광고들의 카피를 보는 기분이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얘긴지 모르겠지만 광고의 카피처럼 사람들에게 짧은 임펙트를 주기엔 충분했을터...

식상하고 재미없고 공감하지 못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금수저니 흙수저니 단어만 나열하고 그칠것이 아니라 이것에 대한 더 깊은, 객관적인 비판의 시각을 가져보는 것이 옳은일이
아닐까??

수저론이 한시대를 풍자하는 아니, 론 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저'라는 단어를 갖다대었을뿐 부, 신분의 차이, 그 한계는 과거에 더 심했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한 이 부분은 지칭하는 단어가 바뀔순 있어도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필자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소위 말하는 수저론을 들고 나온것일까?

개인적으로 노블레주오블리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런거 필요없다.

다만 그들이 해야할 일은 다른곳에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영화 '아이언맨'을 보면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수저 수준이다.

그래서(?) 하고싶은것을 한다.

돈 신경 안쓰고 시간 맘껏 투자한다.

아무데나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다.

"하고싶은일을 해라. 좋아하는 일을 해라. "

라는 등의 썩어빠진 거짓말을 떠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좋아하는일, 하고싶은일을 하라는 얘기는 '노오오오오력'을 강조하는 헛소리랑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찾기도 힘들지만 그 능력을 돈버는데 소진하고만다.

영화 얘길했지만 박사는 첨단기술이 집약된 연구소에서 몇십년을 보냈지만

토니 스타크가 동굴에서 만들어낸 소형 아크원자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는 평범한, 굳에 수저로 표현하자면 동수저나 은수저쯤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럼 영화말고 현실세계를 한번 둘러보자.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

모르는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뉴튼에게 열명이 넘는 가정교사가 있었다고한다.

남들은 사과가 떨어지면 줏어먹기 바빴고

한가롭게 앉아서 사과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지도 못했다.

그의 발견엔 배경이 큰 몫을 담당했다.

쇼펜하우어 또한 부유한 환경에서 살았다.

먹고자고 놀면서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고한다.

시쳇말로 '한량', 소위 말하는 백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현대철학에 큰 획을 긋게된다.

필자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은...

인류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을 위해선 기본적으로 막고사는데 얽메이는 환경을 없애야한다는 것이다.

더 나은 미래와 삶을 꿈꾼다면 누구나 앉아서 사과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한다는 얘기다.

다 본다고 모두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내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또 다른 것을 알아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북유럽 선진국들이 자국민들이 적어도 굶어 죽게 만들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100명중에 단 한명도 만류인력을 찾아내지 못할지라도, 천명중에 아니, 만명, 백만명 중에 한 사람만 그것을 발견해내면된다.

나머지 99만 9999명은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그 한명을 얻게위한 재료(?)의 개념인것이다.

무상복지가 사람은 해태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사람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것은 먹고살만해서가 아니라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국민수준이 열악한 이 나라에서 무상복지를 한다면 온 국민이 일은 안하고 놀기만 하겠지만...

어쨌든 항간에 유행인 수저론은 새로운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들이 사고를 게을리하니 마치 새로운 것인양 유행아닌 유행을 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할 필요도, 이런 글을 왜 쓰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는 이 사회가, 이 나라의 국민들이 한심스럽고 안타까울뿐이다.

이런거 몰라도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오히려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실상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고, 그저 남들에게 이용만 당하며 사는 사람일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국민의 대다수임이 안타까울뿐이지만 말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선 숙연해지고 진지해진다.

이것이 세뇌건 교육이건 강요건간에

세계 어느나라 어느 구석을가도

어느 종교나 철학을 봐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쉽게 다루지 못한다.

결국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민해야할 단어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닐까싶다.

대다수는 돈을 꼽고, 돈에 얽메여 살겠지만

어떤 얼간이가 국내 자동차 생산인건비가 미국보다 높다는 소릴하더라.

통계도 있고, 그에 기인한 기사도 있다.

사실일까??

벤자민 디스레일리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세상엔 3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There are three types of lies -- lies, damn lies, and statistics.

통계조사업에 종사하는, 우리가 접하는 통계를 내는 일을 하는 사람은 이런 얘길합니다.

"어떤 답을 원하시나요?"

맞춤(?) 통계가 가능하고, 통계 결과는 발주처가 즉, 돈주는 놈이 누구냐에떠라 달라질 수 있다는 야기다.

단순 숫자나열에 대한 통계도 백프로 믿을게 못되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통계는 오죽하긋냐.

국내인건비는 정규직만 계산하고 사내하청, 1,2,3차 하청은 값에 없다.

급여의 세전, 세후 금액과 같은 장난질(?)이랄까??

이런 거짓말을 근거라고 디밀며 장난질(?)치는 사람들이 많다.

뭐 댓글부서 운영하는 대기업에서 하는 짓이야 뻔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에 속아넘어감도 사실이니...

가장 위험하고 우려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국민들의 촛불시위에 이은 국회의 탄핵 가결

쓰레기를 치우라니깐 다른 쓰레기로 덮어버린 형국

정해진 프레임과 정보속에서 편향된 시각으로 촛불을 든 국민들

민주주의라는건 애초에 없었는데

마치 민주주의로, 국민의 힘으로 탄핵을 이뤄낸것처럼 되어버렸다.

그저 선동의 결과물에 불과한것을...

이제 국민들은 이 나라의 주인이 본인들이라는 착각에 빠지다 못해 진짜로 믿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숨겨진 내용은 밝혀지지 않는다.

돈을 위해 국민들을 선동한 그들의 속내를 뚫어볼 수 있는 국민은 있기나한걸까...

참 거창하다.

인생의 답.

삶의 목적, 목표

왜 살아야하는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불혹의 나이에 그 답을 찾았다.

그 답은 "왜"이다.

고상한 답도 아니고, 거창한 답도 아니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답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답은 찾는 도구인 것이다.

모든 상황, 사건사고, 인간관계, 사회관계, 업무, 섭식, 건강 등등등

항상 "왜"라는 단어를 달고 살아야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답이 어찌 하나겠는가.

생긴것도 환경도 다 다른 사람인데 그 답도 그 수만큼 많다.

"왜"라는 짧고도 길며, 가볍고도 무거운 이 단어 하나가 인생을 풀어주고 이끌어준다.

반대급부로 "왜"를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인생자체가 낭비고 오답이고 잘못된 것이다.

인생의 시작과 그 끝은 "왜"라는 단어하나로 매듭지을 수 있다.

나는 1번과 2번중에 선택을 해야하는 다양성의 부족과 그들의 독과점을 물려준 것이라 답하겠다.

1번 2번은 정치하는 쓰레기들에게 필요한 것일뿐

국민에겐 독과점의 폐해만 안길뿐이다.

민주주의는 없고 선거도 없다.

돈만 밝히는 재벌과 그 앞마당을 지키는 정치인이 있을뿐

촛불집회는 2002년 미순이효순이 사건때

광화문 집회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촛불을 나눠들고 미군을 책임과 사죄를 외쳤다.

참!! 이때 전경버스로 길을 막는 소위 차막도 처음 도입됐다.

촛불을 들고 추위에 떨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는 미 대사관 앞으로 이동하려했지만 버스로 막아놓은 길을 뚫을 수 없었다.

그저 대사관 앞에서 소리좀 지르겠다는데

촛불을 동원한 첫 평화시위였건만

우리는 그냥 돌아서야했다.

몇몇 정신나간 정치인들의 홍보차량이 군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우리는 버스를 밀라고 했지만 그들은 광고를 위한 행동이었을뿐이다.

이때부터 촛불평화시위가 점점 정착되었고

촛불집회로 무언가를 얻은 경험은 없다.

얻고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댓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 직접투표를 어떻게 얻어냈을까??

일제시대 독립운동도 아닌데

목숨걸고 총칼 앞에서 싸워야했다.

말로해서 해결될 부분이 아니었기에 행동으로 옮겨야했고

말도 안되는 탄압속에서 전쟁과 같은 투쟁을 이어가야했다.

목숨을 잃은이도 있었고 온갖 고문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다.

결국 그들의 핏값으로 직접선거제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럼 촛불평화시위는??

아무것도 잃고싶지 않으니 나타난형태의 모임이라고 본다.

집회? 시위? 웃기는소리다.

그저 인터넷에서 키보드로 떠들어대던 인간들이 오프라인으로 나와서 손가락이 아닌 주디로 떠들어댈 뿐이다.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다.

내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고, 대가를 지불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정도 댓가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큰 솥의 물을 끓여야하는데 촛불하나로 물을 끓이려하는 것이다.

물은 커녕 솥도 뜨거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시위대가 폭력적인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들이 틀에 가둬놓고 기준을 멋대로 새워놓고

그것을 벗어나면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무력에 맞서게위해 시위대 또한 무력을 사용해야했다.

같은 무력이지만 시위대는 폭력이었고, 무력을 휘두르는 시위대는 폭도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멍청한 국민들은 그게 맞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어항속에서 촛불을 켤 뿐이다.

그들은 어항속의 초를보며 '야~ 예쁘다.'라며 농을 던질지도 모른다.

어항 밖으로 나오거나 어항이 깨져야 위기의식을 느낀다.

촛불이 어항밖으로 나오면 혹 카펫이나 쇼파에 불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어항이 깨지면 그 조각에 손발을 벨까봐 겁을 먹게되는 것이다.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어느 역사를 보아도

평화시위(?)로 원하는 것을 얻어낸 적은 없다.

나 또한 폭력시위는 원치 않는다.

시위엔 무력을 사용해야한다.

그들이 폭력이라고 폄하하고 국민들을 선동할 뿐이다.

폭력은 안된다. 무력을 사용해라.

그러면 저들이 폭력을 사용할 것이다.

그럼 그들의 폭력성을 욕하면 된다.

시위대가 폭력을 쓴 것이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한다.

시위대의 힘은 무력이고, 그에 맞서는 공권력은 폭력이다.

정신차리고 잘 봐라. 누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종종 음식에 관련된 잘못된 지식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정설화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그중에 하나가 한상문화고 그릇 하나에 몇명이건 숟가락을 동시에 담그는 것이다.

비위생적이며 감염의 위험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지양해야할 부분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고 명확히 설명하는 사람을 못봤다.

그릇하나에 여러사람이 숟가락을 갖다대는것은 일제치하, 6.25 동란이 원인이 된 것이다.

일제말기 일본군은 전쟁물자보급을 위해 가정집의 쇳덩이는 모조리 약탈해갔다. 솥, 놋쇠그릇, 수저까지 모조리 쓸어갔다.

이 상황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 정확하게 각자 음식을 덜어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대충 나뭇가지 꺾어다가 젓가락을 만들고 숟가락을 만들어 썼다.

그릇이 없으니 큰 양푼 등을 이용해 음식을 담고 모여앉아 숟가락을 같이 담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를 겪는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 그릇을 살 수 없음은 자명한일

역시나 그릇하나에 다같이 달라들(?)수밖에 없었다.

수저를 같은 그릇에 담그는 일은 문화가 아니라 물자부족으로인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맞는 일일게다.

그나마 수저를 사용해서 망정이지 손으로 음식을 먹는 문화였다면 큰 그릇에 음식 담아두고 이사람저사람 손이 드나드는 광경(?)이 벌어졌을꺼다.

숟가락이 없어 젓가락으로만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을 보고 젓가락만 사용하는 식문화라고 하지 않는다.

군에서 2년넘게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고해서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냥 없으니 못쓴것일뿐

음식을 한군데 놓고 다같이 수저를 담그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특정상황에 벌어진 어쩔수 없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 맞는 일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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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나라의 큰 일들에 60갑자를 앞에 붙여서 해당연도를 기억하게 했고

20세기 들어서는 날짜를 붙여 그 사건을 기억하게 했다.

미국의 9.11을 제외하고라도

12.12사태, 4.19의거, 5.16쿠테타 등등

3.1절도 있고 8.15 광복절도 있고

좋은일이건 슬픈일이건 연호, 날짜를 사용했는데

언제부턴가 이것이 사라졌다.

왜??

날짜가 붙어있으면 사건에 대해 더 잘 기억하고, 그 날짜가 매년 돌아올때마다 반복해서 떠올리고

그러다보면 잊지 않고 각인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있는 지배층은 사건에 날짜를 붙이지 않았다.

그저 지역명, 건물명, 선박명 등

사람들이 "세월"이란 단어를 밥먹듯 사용하지만...

'세월호' 는 잊어버리게 되고 그 느낌이 둔해지게 될 것이다.

세월호사태라는 단어보다는 4.16 침몰사건 이라는 명칭이 더 낫지 않을까??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6.29붕괴사건으로 명명했다면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짜를 붙여 10.21교량붕괴사건으로 명명했다면

서해훼리호 침몰사건을 10.10침몰사건이라 명명했다면

그렇게 했다면... 어쩌면....

이번 4.16침몰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우리가 큰 사건사고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엔 이런 이유가 숨어있다.

그 어떤 대통령도, 그 어떤 국개의원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국가는 나와바리고, 국민은 빵셔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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